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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할 수 있는/형식 없는 감상평

[서적] 모르는 여인들(신경숙) 마음의 상처가 깊은 사람들의 이야기


'모르는 여인들'은 여러 해 동안 다양한 곳에 게재됐던 단편들을 모은 신경숙의 단편집 입니다.



세상 끝의 신발

화분이 있는 마당

그가 지금 풀숲에서

어두워진 후에

성문 앞 보리수

숨어 있는 눈

모르는 여인들


이렇게 총 7개의 단편이 수록돼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e-book 표지 스크린 샷>



이 중, 제가 눈여겨본 이야기는 [그가 지금 풀숲에서]와 [어두워진 후에] 입니다.


[그가 지금 풀숲에서]는 '외계인 손'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정신과적 질환이 소개돼 있습니다.

이 야야기의 주인공은 일에 빠져사는 남자 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는 상대적으로 소홀합니다. 귀가시간이 늦고, 그나마도 아내와 대화는 거의 없습니다.


주인공의 아내는 지극히 순종적이고 수동적이며 가정적인 여인으로,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못 합니다. 시어머니가 했던 말을 또하고 또해도 그저 잘 들어주는 착한 며느리 입니다.


이렇게 순한 아내가, 어느 날 부터 왼손에 문제가 생깁니다.

왼손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인다며, 당황하고 초조해합니다.


이런 왼손의 기행은 주로 남편을 향합니다.

왼손은 퇴근해 들어온 남편의 뺨을 사정없이 때립니다.


점점 증상이 심해지기만 할 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병원에 문의해보니, 아내는 '외계인손 증후군'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원인은 뚜렷하지 않다고 하여, 별다른 치료도 못하고 속수무책입니다.



아내의 '외계인 손 증후군'이 심해질수록 남편은 집에 들어와도 아내를 대면하기 어려워집니다. 어느 순간 아내의 왼손이 자신의 뺨을 때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아내의 왼손은 잠자는 남편의 목을 조르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부부는 각방을 쓸 수 밖에 없었고

아내는 남편에게 미안하다며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그 후로 남편은 아내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남편은 밤길을 혼자 운전하다 숲속에서 사고가 납니다. 깨어 난 뒤 움직이지 못하는 몸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아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건지 생각해보지만 끝내 답을 찾진 못합니다.

'외계인 손 증후군(Alien hand syndrome: AHS)'은 흔치 않은 신경 장애입니다. 

* 외계인 손 증후군 위키피디아 페이지 http://en.wikipedia.org/wiki/Alien_hand_syndrome

[그가 지금 풀숲에서]의 주인공의 아내의 왼손은 과격하고 아주 못되고 철없는 행동을 합니다. 남편의 뺨을 때리고, 시누가 좋아하는 꽃게찜에 손을 대고, 예쁜 옷을 가지려고 하고.

헌데, 이러한 행동들은 사실, 아내의 진심이 드러나는 행동임을 너무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외계인 손 증후군이 신경 장애라고는 하지만, 이 아내의 입장에서는 왼손이 억압된 욕구를 분출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거의 전환장애(Conversion disorder)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두워진 후에]는 일가족이 살해된 사건과, 생존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머니, 형, 할머니가 처참하게 살해된 장면을 목격한 아들.
그는 차마 집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자신을 돌보지도 못하고 떠돌아 다닙니다.

그러다 따듯한 도움을 받고 자신을 돌보기 시작하는, 그나마 희망적인 내용으로 끝납니다.


평화롭던 일상을 산산히 부순 지독한 살인사건 묘사에 경악하고 압도돼

혹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인가 싶어서, 이 책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유영철 피해자의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다고 소개돼 있었습니다.



덧.
유영철 사건일지를 곰곰이 살펴보니, 2003년 10월 구기동 사건과 가장 유사합니다.

* 소설에서는 생존자가 아들로 나오지만, 구기동 일가족 살인사건의 생존자는 출근했던 아버지 입니다. *

사건일지가 이 분 블로그에 읽기 편하게 정리돼 있네요. 궁금한 분은 링크 타고 방문해 보세요.